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평도 포격전 (문단 편집)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height=25]] 대한민국 === 우선 북한과 휴전 중일 뿐 전쟁 중이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덕분에 말 많던 [[주적]] 개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어졌다. 2013년 당시 북한의 전쟁 위협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역으로 보면 북한이 [[주적]]임이 명백하다는 점을 국민들이 합의했기 때문이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북한의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전력이자 가장 큰 위협으로 꼽는 포병으로 공격이 이어졌기 때문에 북한군 포병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덕분에 포병은 즉각대기 임무 등 훈련과 경계가 매우 빡세졌다. 사건 이후 서해 5도 지역 주민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으며 그로 인해 [[특별전형]] 중 하나인 [[서해5도특별전형]]이 생겨났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_kGoH74qog)]}}} || || '''연평도 도발 3년...첨단무기 배치 완료" {{{-1 | 2013.11.22. YTN}}}''' || 이 전투로 해병대와 서북도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이것저것 해병대가 득을 많이 봤으며 가장 많은 푸쉬를 받은 유일한 시기였다. [[국방개혁 2020]]으로 갈려나갈 뻔한 [[해병대 제6여단|제6해병여단]]과 [[연평부대]]가 증강된 것이 좋은 예시. 그 외에도 [[스파이크 대전차미사일|스파이크]] NLOS 미사일, [[K-136 다연장로켓|구룡]] MLR 등이 서북도서에 배치되었고, 공기부양정/고속단정으로 편성된 해병 전투주정대가 창설되었다. 원래는 해군이 운용할 예정이었던 상륙기동헬기가 해병대로 넘어간 것 역시 이 사건의 여파.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국군은 또 다른 북한의 도발행위를 대비하고자 10여년 동안 수백 억 달러의 거금을 투자해 [[대포병 레이더#s-2.3|신형 대포병레이더]], [[천무 다연장로켓]], [[KGGB]] 등의 무기체계들을 대량으로 실전배치 해버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ybvOHGrmNR0)]}}} || || '''연평도 포격 4주기, 대규모 사격훈련 실시" {{{-1 | 2014.11.21. YTN}}}''' || 당시 [[20대]], 즉 1980년 중후반~1990년대 초반생들의 대북관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평가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경우 유년기에 겪었기 때문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연평도 포격전의 경우 어느 정도 철이 들고 처음으로 경험한 북한의 이미지가 바로 남한 영토에 대한 최초의 포격도발인 연평도 포격전이라는 점은 이들의 반북 성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시 군복무 중이던 청년들은 휴가, 외박이 취소되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등 실질적인 불이익을 본 이들이다 보니 이런 경향이 더 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